헤어질 결심 (2022) 감상

 

각본도 연출도 연기도 완벽한 영화. 하지만 왜 순전히 좋아하기 어려울까?

 

해석과 불호 후기가 섞여 있습니다. 한 번 본 후 관련 글을 조금 찾아봤지만 제가 느낀 미묘함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일단 적어봐요. 제목과 교포 키워드로 검색한 결과만 몇 개 읽어서 주류 해석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반박 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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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은 내가 웬만한 소재는 다 잘 본다는 걸 말해둬야겠다. 피하는 소재를 굳이 꼽자면 아동 학대나 괴담 정도가 있다. 불륜은 해당하지 않는다. 때에 따라 좋아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헤어질 결심'을 보고 묘한 감상을 느낀 것이 소재에 대한 불쾌감 때문은 아니라는 소리다. 이 완벽한 영화가 남긴 껄끄러운 꼬리는 그보다는 누구에게 끌리는지, 왜 끌리는지의 문제다. 언어와 배타성의 문제이고, 여성을 미스터리에 가둬두기 위해 교포라는 속성을 어떻게 이용했는지의 문제다. 하지만 이것만 다루지는 않고, 해준과 서래의 관계를 전반적으로 얘기해보겠다.

이야기의 끝에서 시작해 보자. 서래는 해준의 미결 사건으로 남았다. 사람으로서가 아니다. 사건으로서다. 파일철 위에 그려졌으나 파도에 쓸려 뭉그러진 초상이다. 기록되지 않은 까닭에 기억으로 덧그려야만 하는 이 표상은 얼마나 서래와 닮아 있을까? 해준에게 서래는 얼마나 인간일 수 있었을까?

 

이야기의 시작으로 돌아가 보자. 젊은 여성이자 교포 3세이고 밀항해 입국하기까지 한 서래는 시작부터 약자성을 겹겹이 안고 있다. 이 약자성은 서래라는 인물을 대변하기보다는 그 매력을 부각하는 용도로 쓰인다. 보는 이(해준과 시청자를 모두 포함)가 서래의 핵심에 곧장 도달하지 못하게 하는 한편으로 흥미를 놓치지 않고 계속 좇을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는 장치다.

 

교포로서 서래는 지금까지의 스테레오타입과 구별된다. 영리하고, 주도적이고, 세련된 옷도 입는다. 하지만 여전히 이방인인 서래가 가진 이 차별점은 또 다른 특이성으로서 해준의 관심을 끄는 요소가 된다.

 

언어를 들어 얘기해보겠다. 외국어 사용자가 한국말을 할 때는 사투리와도 다른 독특한 억양이 묻어난다. 특징적이라 한마디 듣자마자 바로 알아챌 정도다. 보통 이 어눌한 발음이 (당연히 모국어로 말할 땐 굉장히 유창함에도) 개인의 저능함과 연결 지어 생각되는데, 서래의 경우 그렇지 않다.

서래는 조금은 느린 템포로 또박또박 말한다. 문장은 짧고 어휘는 과감하다. 자주 같이 오지 않는 단어를 도드라지게 배치해 (각본상 의도된 대로) 오히려 어감의 미묘한 결을 살린다. 능숙한 한국어 사용자가 아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서래의 언어는 시적이고, 짧은 말 아래 감추어진 비밀을 상상케 한다. 이는 생소할지언정 낮잡아보기는 어렵다.

 

서래는 해준의 삶에 돌연 등장한, 아름답고 정체 모를 존재다. 무언가 낯설면서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을 마주했을 때 보이는 행동 양식은 크게 세 가지다. 밟아 부수는 게 가능해질 때까지 깎아내리거나, 신격화하거나, 탐구하는 것이다. 사실 이 셋은 모두 같은 감정에서 기인한다. 바로 소유욕이다. 불가해한 것을 이해할 만한 영역으로 끌어내려 손안에 쥐고자 하는 욕망이다.

다만 표출 방식은 극명하게 갈리므로 해준이 어느 쪽인가 살펴보자면 세 번째다. 해준은 서래를 둘러싼 베일을 벗겨내고 싶어 했다. 그런 다음 눈을 맞추고 싶어 했는지는 의문이지만 어쨌거나 베일 너머를 보길 원했다. 사건을 기대하는 해준에게 서래의 신비는 한발씩 늦게 추적할 수밖에 없는 재해인 동시에 맞춤형 테마파크와 같았을 테다.

 

겹겹이 놓인 서래의 이질성은 마치 단서라도 되듯 탐구자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를 좇아 달려가다 보면 끝에는 이해와 결합이라는 포상이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결말을 안다. 이 사건은 끝내 미결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 전에 해준은 형사의 방식으로 서래를 탐구한다. 망원경을 들고 서래의 주변을 관찰한 것이다. 이처럼 미지의 존재에 대한 해준의 탐구는 수사라는 명목으로 일방적이고 관음적으로 시작한다. 애초에 불륜을 다룬 이야기라는 점에서 밤중에 내밀한 집안을 들여다보는 행위는 영화의 톤을 적절하게 유지한다. 스스로도 내심 불건전하다고 느끼는 일은 배덕감을 내포한 채 지속된다. 이는 '해준이 지켜주는 것 같아 안심했다'는 서래의 포용으로 마치 합의된 일탈인 양 정당성을 얻기까지 한다.

 

이때 서래는 남편에게서 얻지 못하는 안정감을 해준에게서 얻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아니다. 서래의 사랑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해준의 시선을 자신에게 붙들어두고 혼란스러운 말을 흘려 넣는 태도는 안정보다는 (살인자 혹은 여성의) 불안에 가까워 보인다.

그러나 해준은 교묘하게 비틀린 단서를 좇아 기어이 정답에 도달한다. 아주 짧은 순간 둘의 무르고 약한 부분은 서로 스친다. 그 순간 해준은 붕괴하고, 사랑은 옮아간다. 둘의 사랑은 고작 끝점과 시작점만 맞닿아 있어 결코 겹치지 않는다.

 

'헤어질 결심'을 1부와 2부로 나눈다면 2부에 속할 서래의 사랑에 대해 말하자면, 서래는 영리한 사람이다. 해준이 어떤 방식으로 자신을 사랑하려 했는지 안다. 따라서 두 사람의 재회는 첫 번째와 유사한 양상으로 재현된다. 하지만 이번에는 서래가 스스로 베일을 뒤집어쓴다. 서래가 뒤쫓지 않고는 못 배길 미스터리를 자처하므로 해준은 또다시 의무인 척 사감 가득한 추적을 시작한다. 그러나 이 추적은 종결되지 못하여, 이어진다.

해준과 서래는 역할 면에서 대척점에 서 있다. 서로를 사랑한 이유도 그렇다고 하겠다. 해준은 서래에게서 동질성을 발견하지만, 어떻게 둘이 같아질 수 있을까. 해준은 서래의 꼿꼿함을 사랑했고 서래는 해준의 붕괴됨을 사랑했는데. 해준은 불안정한 발판에 바르게 선 서래를 그렸고 서래는 안정적인 발판에서 무너지는 해준을 보았다. 결코 속할 수 없는 타자의 세계에서 '나'의 흔적을 발견했을 때 사랑은 시작되었다. 때문에 해준이 서래에게 느끼는 끌림은 근본적으로 외도일 수밖에 없다.